잔 자코모 트리불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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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활동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프랑스 왕 루이 11세를 돕기 위해 군사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나폴리 왕국 등 다양한 세력의 용병으로 활약했다.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프랑스 편에서 군사적 업적을 쌓았으며, 특히 밀라노 공국 점령에 기여하여 밀라노 총독과 프랑스 육군원수 직을 역임했다. 그는 예술 후원에도 힘썼으며, 브라만티노 등의 예술가를 후원했다. 그러나 가혹한 통치로 인해 민심을 잃고 실각하여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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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자코모 트리불치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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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40년경 |
사망 | 1518년 12월 5일 (78세) |
사망 장소 | 프랑스, 샤르트르 |
배우자 | 마르게리타 콜레오니 |
자녀 | 테오도로 8세 트리불치오 스코티아 트리불치오 이폴리타 트리불치오 카타리나 트리불치오 안토니오 트리불치오 |
직업 | |
직업 | 군인, 콘도티에로 |
군 경력 | |
복무 |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프랑스 왕국 |
계급 | 원수 (프랑스) |
참전 | 파치 가문의 음모 토르토나 전투 카스텔라로 전투 오르소 전투 포르노보 전투 아냐델로 전투 라 모타 전투 마리냐노 전투 |
기타 정보 | |
소속 | 트리불치오 가문 |
2. 생애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등과 함께 교육받았다. 초기에는 밀라노 공국을 위해 복무하며 군사 경력을 쌓았으나, 1483년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떠나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충성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1488년 나폴리 왕국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며,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에는 나폴리 측 협상가로 활약했다. 샤를 8세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프랑스로 데려갔고, 이후 트리불치오는 포르노보 전투 등에서 프랑스군을 위해 싸웠다.
루이 12세는 트리불치오에게 밀라노 공국 점령을 맡겼고, 1499년 트리불치오는 밀라노를 함락시키고 루이 12세에게 도시의 열쇠를 바쳤다. 이후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되어 아냐델로 전투, 노바라 전투, 마리냐노 전투 등에서 프랑스군을 이끌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총독으로서 과도한 세금 징수와 전횡으로 인해 결국 실각했고, 프랑수아 1세에게 복권을 요청했으나 실패한 뒤 1518년 아르파종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등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1465년 그는 루이 11세를 도우러 스포르차 군대와 함께 프랑스로 갔다. 그는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에 맞선 밀라노 공국의 전쟁에도 참여했고, 로마냐에서는 페데리코 3세 다 몬테펠트로와 같이 싸웠다.1478년 교황 식스토 4세의 확장 정책에 맞서 피렌체 공화국을 지원했다. 2년 뒤 그는 메스코 성을 얻었다. 1483년 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저버리고 샤를 8세에게 충성을 하였다. 1484년 마르티네뇨에서 베네치아군을 격퇴시켰다.
2. 2. 프랑스와의 관계
1483년,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떠나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1484년에는 마르티네뇨에서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다.1488년 6월, 나폴리 왕국과 국왕 페르디난도 1세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는 페르디난도 1세의 손녀이자 알폰소 2세의 딸인 이사벨라 다라고나와 결혼했다. 1493년,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는 장인에게 숙부 루도비코 스포르차로부터 공작 자리를 되찾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샤를 8세에게 나폴리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1494년,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하여 나폴리와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이때 트리불치오가 협상을 맡았다. 샤를 8세는 트리불치오의 능력에 감탄하여 그를 고용하고 연간 10000두카토의 봉급을 주기로 했다. 트리불치오는 샤를 8세의 군대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갔고, 포르노보 전투 (1495년)에서 프랑스군 편에서 싸웠다. 같은 해 6월 15일, 아스티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프랑스 귀족 작위와 영지를 받았다.
2. 3. 밀라노 공국 점령과 통치
1498년 샤를 8세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인 루이 12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로부터 밀라노 공국을 점령하기 위해 트리불치오가 이끄는 대군을 소집했다. 트리불치오는 여러 요새화된 도시들을 점령하여 루도비코가 밀라노를 포기하게끔 하였다. 1499년 10월 6일, 그는 루이 12세에게 밀라노의 열쇠를 선물하였다. 루이 12세는 그를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미 9월 29일에 프랑스 육군원수로 임명한 상태였다.트리불치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아냐델로 전투에서 승리했고, 노바라 전투와 마리냐노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1516년에는 막시밀리안 1세의 공격에서 밀라노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도 했다.
2. 4. 실각과 죽음
그러나 총독으로서 그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전횡은 곧 그의 불명예를 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프랑수아 1세에게 찾아갔지만, 허사였다. 그는 1518년 아르파종에서 사망했다.그의 조카 테오도로 트리불치오도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는 군 지휘관이었고, 밀라노, 제노바, 리옹의 총독을 잠깐 맡기도 했다.
3. 예술 후원
트리불치오는 막대한 재산을 모아 그 일부를 예술 후원에 사용했다. 특히 브라만티노의 작품에 후원을 많이 했는데, 산 나차로 인 브롤로 성당에 있는 트리불치오 예배당과 현재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에 있는 12개월을 표현한 테피스트리 연작이 대표적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트리불치오의 모습을 본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대형 기마상 설계를 의뢰받았으나, 실제 제작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인상적인 그림 단계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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